▲ 또 한 명의 한국 축구 선수가 유럽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뛰어난 개인기와 많은 활동량을 지닌 황인범이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스포티비뉴스 이종현 기자가 쓴 23일 자 '20살 때 벤피카 무산' 황인범, '22살 A대표'로 분데스리가 노린다 제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2017년 겨울, 포르투갈 벤피카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던 황인범(당시 20살). 벤피카와 대전 시티즌의 이적료 이견으로 영입이 성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2년이 지나 황인범은 대전에서 더 성장했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게 됐고, '벤투호의 황태자'로 성장해 A대표 팀의 주축으로 자랐고 독일 분데스리가 묀헨글라트바흐를 비롯한 복수 구단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다.

이 기사 머리에 나오는 두 개의 클럽 이름이 글쓴이 눈길을 붙잡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황인범이 유럽에서 더욱 힘찬 날갯짓을 하기 바라며 오래전 외국 축구 클럽 얘기를 소개한다. 어느 누구도 한국 축구 선수가 유럽에서 뛴다고 생각하지 못할 때 얘기들이다.

외국 유명 축구 클럽의 방한 역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됐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국 함대 승무원이 국내 여러 항구에 머무는 사이 친선경기를 벌인 게 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고 10여년 뒤인 1957년 9월 이스라엘의 하포엘 텔 아비브가 한국을 찾으면서 외국 유명 클럽의 방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포엘은 국가 대표 팀과 3차례 경기해 1승2패를 기록했다.

하포엘과 경기에 앞서 그해 5월 국가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한 선발전이 열렸는데 출전 팀은 CIC(방첩대, 국가안보지원사령부 할아버지뻘 되는 부대) 해병대 병참단 HID(육군 첩보부대) 국민대 신흥대(경희대 전신)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서울대 등이었다. 출전 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무렵 축구를 비롯한 국내 스포츠는 군 팀이 앞장서서 이끌고 있었다.

요즘은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 무렵 이스라엘은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이스라엘은 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서부 지역 예선에서 버마(오늘날 미얀마) 이란 태국 등을 제치고 홍콩에서 열린 본선에 올라 한국과 월남(통일 전 남베트남) 홍콩 등과 겨뤄 한국에 이어 준우승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축구 인연은 1970년대까지 이어지는데 한국에 몇 차례 방문해 차범근과 비교되며 올드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데차이 슈피글러는 프랑스 리그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뛴 그 무렵 아시아 최고 수준의 선수였다.

1960년대에 한국에 온 외국 클럽 가운데 축구 팬들이 잊지 못할 경기가 있다. 1969년 6월 이제 막 야간 조명 시설을 갖춘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서독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국가 대표 2진의 대결이다.

세계적인 클럽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은 만원을 이뤘다. 육상 경기용 트랙까지 관중이 들어찼다.

그 무렵 골키퍼 이세연을 비롯해 김정남 김호 김정식 서윤찬 김기복 임국찬 이이우 이회택 박이천 정강지 정병탁 등 사실상 국가 대표 1진인 ‘양지’(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의 성적을 거두자 이에 자극을 받은 중앙정보부가 만든 축구 팀. 팀 이름은 중앙정보부 부훈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따왔다)는 그리스에서 열린 국제군인축구선수권대회 출전을 포함해 ‘105일 유럽 전지훈련’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경기엔 국가 대표 2진급 선수들이 출전했다.

결과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3-1 완승이었는데 미드필더 귄터 네처는 코너킥을 골로 연결해 3만여 관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감아 찬 공이 골키퍼 뒤로 돌아 반대편 포스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국가 대표 주전 골키퍼 이세연이 빠져 그 같은 골을 내줬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네처의 킥은 분명 날카로웠다. 이때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 ‘바나나킥’이었고 뒤에 이 말은 사전에도 올랐다.

더욱 놀라운 ‘바나나킥’이 1년여 뒤에 나왔다. 포르투갈 리그 벤피카 FC의 에우제비오는 1970년 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국가 대표 2진 백호와 경기에서 30m가 넘는 장거리 프리킥을 성공했다. 에우제비오가 오른발 안쪽으로 감아 찬 공은 강한 회전이 걸리며 큰 곡선을 그렸고 그대로 골대 왼쪽 위에 꽂혔다.

벤피카는 백호를 5-0으로 크게 이겼고 국가 대표 1진인 청룡과는 에우제비오와 이회택이 한 골씩을 주고받아 1-1로 비겼다. 이때 벤피카 클럽에는 움베르트 쿠엘류 전 한국 대표 팀 감독이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에는 벤피카 외에 브리질 리그의 플라멩고, 스코틀랜드 리그의 던디 유나이티드, 잉글랜드 리그의 코벤트리 시티 등이 방한 경기를 가졌다.

1972년 6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 리그의 산토스 FC는 서울운동장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이 한 골씩 넣은 국가 대표 팀을 3-2로 물리쳤다. 산토스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을 3-0, 홍콩을 4-0으로 완파했다. 1976년 5월에는 잉글랜드 리그의 맨체스터 시티가 방한해 국가 대표 1진인 화랑을 3-0으로 두 번 이겼고 국가 대표 2진인 충무에 2-4로 졌다.

1971년 창설된 박대통령배쟁탈축구대회는 1976년 제6회 대회부터 초청국을 아시아에서 유럽, 남미 등으로 넓히면서 외국 클럽과 국가 대표 팀이 경기를 갖는 무대로 바뀌었다. PSV 에인트호벤(네덜란드) 제노아(이탈리아) 바이에르 레버쿠젠(서독) 브뢴드비(덴마크) 리에르세(벨기에) 등 세계 각국의 여러 클럽이 이 대회에 출전했다.

1979년 9월에는 프란츠 베켄바워와 요한 네스켄스가 이끄는 미국 프로 축구 NASL(North American Soccer League, Major League Soccer의 전신)의 뉴욕 코스모스가 한국을 찾았는데 화랑에 각각 0-1과 1-3으로 졌다.

한국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고 우수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외국 리그 클럽들이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을 줬다. 그 가운데 황인범이 입단할 뻔했던 벤피카, 입단 가능성이 있는 묀헨글라트바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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