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정형근 기자] "합숙 훈련은 정말 반드시 필요하다. 합숙이 폐지된다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이 안 나올 것이다. 합숙 훈련을 하면서 국제대회에 계속 참석해야 올림픽 티켓을 딸 수 있다. 합숙을 못하면 종목마다 엄청난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쇼트트랙 심석희의 성폭행 폭로 이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가 확산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문체부의 개선안에는 합숙 훈련 폐지와 소년체전 폐지, 병역·연금 혜택의 축소, 대한체육회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분리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문체부는 "성적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체육계 비리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체육인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현장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문체부의 개혁안 가운데 '합숙 훈련 폐지'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성적과 직결된다. 2020년 도쿄올림픽이 1년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합숙 훈련 폐지'는 현장의 혼선을 가져오고 있다. 

스포티비뉴스는 체육계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국의 전통적 '효자 종목'인 양궁(김성훈)과 태권도(김종기), 펜싱(양달식), 레슬링(박장순), 유도(금호연)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5개 종목의 감독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합숙 훈련을 폐지하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폭행이나 성폭행을 한 지도자가 엄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체육인 전체를 죄인처럼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일부 잘못된 지도자의 판단으로 불거진 일이다. 훌륭한 지도자와 열심히 자신의 미래를 위해 훈련하는 선수도 많다. 그런데 선수들이 흘린 땀에 대한 값어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특정 부분만 주목받고 있다."

한국 스포츠는 지난 50여 년 동안 엘리트 선수들의 합숙 훈련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88 서울 올림픽부터 2018년 평창 올림픽까지, 한국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스포츠 강국이 된 것은 합숙 훈련의 공이 컸다. 선수층이 얕고 선수촌 이외에 마땅한 훈련 시설이 없는 한국에서 합숙 훈련은 굉장히 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보통 2월 초에 선수촌에 들어가 12월 말까지 합숙 훈련을 진행한다. 각종 국·내외 대회를 감안할 때 사실상 1년 내내 합숙 훈련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장소가 국가대표 선수촌 내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합숙 훈련을 하면 선수들이 지도자의 (성)폭력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결국 '합숙 폐지' 대책까지 나왔다. 
▲ 현장 지도자들은 합숙 훈련이 폐지되면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할 것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합숙 관련 발언은 '합숙 폐지' 논의에 급물살을 타게 만들었다. 문 대통령은 1월 1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체육계 폭력·성폭력에 대한 엄벌을 지시하며 "운동부가 되면 초등학생부터 국가대표까지 합숙소에서 보내야 하는 훈련체계에 대해서 검토하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11일 만에 문체부는 '합숙 폐지'가 포함된 개혁안을 내놓았다.

물론 문체부의 개혁안에 '합숙 폐지'가 포함됐다고 곧바로 실행되는 건 아니다. 우선 문체부는 체육계 개혁을 위해 출범한 '스포츠혁신위원회'를 중심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체육 현장은 이미 혼선이 발생했다. 일부 종목은 문체부의 개혁안이 나온 뒤 합숙 시기를 늦췄다. 

펜싱 국가대표 신아람은 "정부가 합숙 폐지와 같은 대책을 발표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합숙을 통해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고, 꾸준한 컨디션 관리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합숙을 폐지하기보다는 지도자 선발 과정과 교육 감시 체계를 보완하고, 물의를 일으킨 지도자는 영구제명하는 등의 엄벌에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은 금메달 30개·종합 2위를 목표로 삼았다. 

반면 한국은 성적 지상주의와 엘리트 체육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에 나섰다. '국위 선양'에 초점을 맞춰 발전한 엘리트 스포츠는 국민의 눈높이에 더 이상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금메달이 선수의 인권보다 앞서는 성적 지상주의를 타파하고 생활체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 상황에서 한국이 도쿄 올림픽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둬도 국민들은 "괜찮다"며 격려할 수 있을까. 올림픽 메달만을 바라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선수들은 '합숙 훈련 폐지'가 포함된 문체부의 개혁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충분한 여론 수렴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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