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수 서울 시장이 1981년 9월 16일 기자 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와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 방침과 바덴바덴 IOC 총회에 유치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88년 여름철 올림픽 유치 계획 주사위는 던져졌고 애초 유치 의사를 보였던 호주 멜버른과 그리스 아테네가 중도 포기해 1988년 여름철 올림픽 유치 경쟁은 한일 양국의 대결로 압축돼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란 관측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본격적으로 나고야를 상대해 유치 활동을 펼치느냐, 마느냐 하는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장애물이 유치 작업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KOC가 IOC와 국제 경기 연맹이 제시한 경기장 시설 기준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잠실에 짓고 있는 올림픽 주 경기장 외에 20개 경기장을 새로 건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건설 경비 문제가 제기된 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올림픽 개최 경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크게 늘어나면서 이 문제로 애초부터 회의적인 경제기획원의 반대에 부딪쳤고 국무총리실과 문교부의 적극적인 추진 방침과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결국 이 문제는 국무회의로 넘겨졌고 1981년 4월 16일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노신영 외무부 장관, 이규호 문교부 장관,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대한육회 회장, 김택수 IOC 위원 등이 참석한 정부의 유치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주무 부처인 문교부 장관이 그간의 올림픽 유치 신청 경과를 보고하자 경제기획원 장관과 서울시장은 한목소리로 재정 부담을 내세워 강력한 유치 반대 의견을 밝혔다. 이날 회의는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과도하게 시설비를 투자할 수 없으며 이미 앞서 유치 활동을 펼쳐 온 나고야를 이길 수 없다는 등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 보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1차 회의 이후 열흘 만에 다시 열린 2차 회의에서도 찬반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명분 있는 후퇴론‘이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뒤를 이어 5월 16일 국무총리 공관에서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3차 정부 대책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종전과는 달리 명분 있는 퇴로가 쉽지 않은 데다가 대통령의 강력한 유치 의사가 감지돼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주무 부처인 문교부의 이규호 장관은 1970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사례를 들면서 대통령의 보증서까지 첨부한 올림픽 유치 신청을 뚜렷한 명분 없이 철회한다면 국가의 국제적인 신용도가 크게 추락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일본과 당당한 표 대결을 강력히 주장했다. 

뒤를 이은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도 적극적인 유치 활동으로 표 대결을 벌이는 것이 국가의 대외 홍보에도 유익할 것이라고 거들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 회장 역시 설사 표 대결에서 일본을 못 이기더라도 국가의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유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날 회의는 예정된 IOC 총회 때까지 득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유치 활동을 펴는 것이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문교부가 제시한 유치위원회 구성안을 채택하는 한편 재외 공관을 내세우는 유치 활동도 활발히 펼쳐 나가기로 했다. 이날 결정에 따라 정주영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민간인 차원에서 올림픽유치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됐다. 

3차에 걸친 정부의 올림픽 유치 대책 회의에서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는데도 서울시와 경제 관료들은 재정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끈질기게 회의론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또 다른 여론 조성에 앞장섰다. 

이 장관은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적극적인 협조와 외무부, 문화공보부 등 경제 부처 장관들을 제외한 각료들의 동조를 이끌어 내고 유치의 성패 여부를 떠나 유치 운동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긍정론을 확산해 나갔다.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으로는 서울이 나고야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무엇보다도 서울은 남북 분단국의 수도로 최우선 과제인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며 동서 냉전의 국제 정치적 환경으로 미뤄 볼 때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해 1980년 모스크바 대회 같이 반쪽 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반면에 경쟁국인 일본은 일찍이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데다가 한국에 훨씬 앞서 장기간에 걸친 유치 활동을 펼친 관계로 대세를 일찌감치 굳힌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스포츠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정부 내 비관론을 잠재우면서 그동안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재정리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확고부동한 결심을 재확인했다. <계속>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