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특별시 시장(오른쪽)이 1988년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유치 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우리나라 스포츠 외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통틀어 세계를 상대로 펼친 외교사 가운데 으뜸가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태동부터 1981년 성공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펼쳐진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엎치락뒤치락 이어진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유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힘을 가졌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았던, 그래서인지 별명이 ‘피스톨 박’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의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태릉국제사격장에서 태권도를 제외한,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박종규 회장은 대회 기간을 앞뒤로 한국에 온 국제 스포츠계 거물급 인사들로부터 ‘앞으로 한국은 올림픽도 개최할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는 찬사를 듣고 고무돼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 구상을 밝히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스포츠 팬들은 잘 알고 있지만 역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국제 경기 단체 임원들은 ‘립 서비스’의 대가들이다. 

아무튼,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마친 뒤 1979년 2월 제25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박종규는 취임과 동시에 올림픽 유치의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사 출신의 조상호 김세원을 부회장으로 영입해 스포츠 외교 진용을 구축하는 한편 김예식 이원웅 이태근 등 기획과 외국어에 능통한 전문 위원들을 스카우트해 실무 추진 팀을 가동했다. 

그러나 당시 체육회 내 분위기는 학력이나 경력으로 미뤄 볼 때 스포츠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을 불러들여 허황된 올림픽 유치 꿈을 꾸고 있다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렇지만 이들 3명의 전문 위원들은 뛰어난 기획력으로 올림픽 유치 작업을 준비해 나갔다.

박종규 회장은 체육회 내 진용을 이 같이 정비한 뒤 첫 포석으로 1979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ANOC(국가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 창립 총회와 대륙별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총회 및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집행위원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해 올림픽 유치를 위한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산후안 NOC 총회는 새로 출범하는 ANOC의 대륙별 부회장을 선출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로 박종규 회장은 ANOC 총회에서 투표 없이 회장에 당선된 멕시코의 라냐 마리오 바스케스와 의기투합해 장차 국제 스포츠계를 이끌어 나간다는 복안으로 아시아 지역 부회장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투표 결과 오일달러의 위력을 앞세워 등장한 신흥 서아시아 세력인 쿠웨이트의 셰이크 파드에게 9-10으로 졌다.

박종규 회장이 1표 차로 석패한 데에는 AGF[아시아경기연맹,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신] 회장이었던 인도의 메라와 파키스탄의 초드리(국제복싱연맹 사무총장, 뒤에 회장)가 셰이크 파드를 당선시키기 위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AGF는 아시아 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6월 26일 저녁 8시 산후안 시내 팰리스호텔에서 총회를 소집했고 이 총회에는 한국을 비롯해 20개 회원국과 중국이 옵저버로 참석했다. 

그런데 당연히 참석해야 할 정회원인 자유중국(오늘날 대만)이 불참했다. AGF 메라 회장이 회의 시작 1시간 30분 전 자유중국은 참석할 회의가 아니니 참석치 말라는 통보를 자유중국 대표인 쉔취나밍에게 해 한국은 확실한 지지 표 하나를 잃은 것이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은 자유중국 대표를 수소문해 회의장으로 데려왔지만 이미 투표가 끝나 때는 늦었고 박종규 9표, 셰이크 파드 10표, 몽골 1표였다.

한국은 의도적으로 자유중국을 배제한 AGF 총회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ANOC 라냐 바스케스 회장도 이의를 제기해 투표를 다시 하도록 권유했지만 박종규 회장은 뒷날 진행해야 할 올림픽 유치 작업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다. 이 결정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찬사를 받았고 깔끔한 스포츠 외교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 됐다. 

대한체육회는 1979년 3월 주무 부서인 문교부에 유치 건의서를 제출했고 문교부는 주 일본 한국 대사관 협조를 받아 1964년 도쿄 올림픽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문교부는 뒤이어 1979년 8월 3일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유치 문제를 국민체육심의위원회에 상정했고 심의위원회는 신현확 경제기획위원장을 위원장으로 박찬현 문교부 장관, 박동진 외무부 장관, 정상천 서울특별시 시장, 윤일균 중앙정보부 차장,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 김택수 IOC 위원 등 7인 소위원회를 구성해 1979년 8월 22일 첫 대책 회의를 가졌다.

7인 소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는 국민 총화와 대 공산권 교류 및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에서 우위 확보를 위해 바람직스럽다는 결론을 내리고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도 올림픽 전초 대회로 유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특별시 시장은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 김택수 IOC 위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박충훈 무역협회 회장이 배석한 가운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고 1988년 제24회 여름철 올림픽을 한국의 수도 서울에 유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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