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체전 마스코트.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올해로 99회를 맞이한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가 다음 달 12일부터 18일까지 익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14개 시·군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에는 세종특별자치시 등 전국 17개 시도에서 47개 종목 2만4,924명(선수 1만8,601명 임원 6,323명)이 참가한다. 

2019년 서울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제100회 대회에 앞서 벌어지는 이번 대회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경기도가 1,575명의 선수가 출전을 신청해 최다를 기록했고 1,447명의 서울특별시가 그 뒤를 이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한 김한솔 여서정(이상 기계체조) 김서영(수영) 등 국가 대표 선수들이 소속 팀으로 돌아가 아시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펼쳐 보인다. 

국가 대표 선수 또는 국가 대표급 선수들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는 주요 경기장은 익산공설운동장(육상) 완산수영장 전라북도양궁장(임실군) 전북대체육관(체조) 김제시민운동장(축구) 전주체육관(농구, 프로 농구 전주 KCC 홈구장) 남성고체육관(배구) 익산야구장 정읍국민체육센터(핸드볼) 전라북도종합사격장(임실군) 춘향골체육관(레슬링, 남원시) 고창군립체육관(유도) 태권도 T1 경기장(무주군, 2017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 곳) 익산체육관(펜싱) 군산대체육관(탁구) 원광대체육관(배드민턴) 등이다. 

이들 경기를 보러 가는 길에 둘러볼 만한 전북 도내 명소로는 전주 덕진공원 군산 근대 문화 도시 남원 광한루원 김제 벽골제 왕궁 보석 테마 관광지(익산) 내장산 국립공원 삼례 문화 예술촌 마이산 등이 있다. 

전국체전은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와 생활체육을 총괄하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가장 큰 행사다. 1920년 7월 13일 창립한 조선체육회가 그해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치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제100회를 맞기 직전인 전국체육대회의 효시다. 

대회 이름은 ‘전조선~’이었으나 첫 대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다. 중학단에는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보성고보 등 5개 팀이 참가했고 청년단에는 경신구락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서울YMCA 등 5개 팀이 출전했다. 

이렇게 출발한 전국체전은 한국전쟁 와중에도 열렸다. 1951년 10월 27일부터 닷새 동안 펼쳐진 제32회 전국체육대회는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는 경기장을 마련하는 게 마땅치 않아 전라남도 광주시의 광주서중 광주고 광주사범 등 운동장을 중심으로 어렵사리 진행됐다. 이 대회에는 15개 종목에 걸쳐 4,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 동계 대회는 1952년 1월 19일 수원의 서호 특설 링크에서 치러졌으나 빙질이 나빠 기록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국체전은 세계로 뻗어 나가는 스포츠 한국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전국체전 관련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전라북도에서 여는 전국체전은 글쓴이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79년 6월 서울신문이 발행하는 ‘주간 스포츠’ 기자로 체육 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글쓴이는 이듬해인 1980년 6월 춘천과 원주에서 열린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체전을 처음 취재했다. 뒷날 유명 소설가가 되는 김훈 기자가 한국일보 취재반을 이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신여중 임혜숙(일신여상을 거쳐 국가 대표로 성장한다)을 취재할 때 이창호 당시 미도파 여자 배구단 감독이 “공격형 세터로 크게 성공할 선수”라는 코멘트를 받았던 게 엊그제 일 같다. 

그때 인천여중 선수로 경기도를 대표해 출전한 이영숙은 이후 한국 여자 육상 단거리의 강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게 된다. 이 대회 이후 14년 뒤인 1994년 이영숙이 세운 11초49의 한국 최고 기록은 25년 가까이 깨지지 않고 있다. 이영숙은 이 대회에서 100m와 200m 2관왕이 됐는데 100m 기록이 12초1로 당시 여중생 기록으로는 매우 빠른 것이었다. 

기자 초년병으로 처음으로 나선 전국 규모 종합 경기 대회이니 얼마나 긴장했을까. 그렇지만 취재 외에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전국체육대회는 당연하고, 그 무렵에는 전국소년체육대회에도 시도 선수단과 함께 온 취재진으로 대회장 주변이 북적거렸다. 

지방에 주재하고 있는 회사 선배들과 교류하고 강원도 관계자들이 여는 회식 자리에도 참석했으니 스포츠 기자가 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대회에 몇 가지 사실을 더 보태면, 강원도는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유치하면서 온의동 종합운동장 안에 야구장을 지었다. 이 야구장은 철거됐고 2018년 현재 의암 야구장이 강원도 야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춘천 야구장에서는 1982년 출범한 프로 야구가 1980년대 후반까지 간간이 경기를 치렀다. 소년체육대회를 열기 위해 만든 구장을 프로 야구가 슬쩍 끼어 들어 사용한 것이다. 

초보 기자 때 눈에 익혀 뒀던 춘천 야구장에서 1986년 4월 청보 핀토스-빙그레 이글스의 경기를 취재했던 기억도 난다. 야구 올드 팬들 사이에서 허구연 감독의 '7전8기'로 유명한 경기로 청보가 경기 막판 3-8의 열세를 딛고 9-8로 대역전승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체전 개최 시도로 떠나는 서울시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출정식을 치르는 장면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곤 했다. 체전의 시도별 종합 순위가 요즘의 프로 야구 순위만큼 스포츠 팬들의 관심을 모으던 때다. 

대회 폐막일 종합 순위 1~3위를 차지한 시도 선수단 단장이 자기 몸집의 절반쯤 되는 큰 트로피를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1면에 실리곤 했다. 전국체전은 1960, 70년대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스포츠 소년’이었던 1960년대 중반, ‘언제인가는 저 대회를 취재해야지’라는 꿈을 키우고 있던 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전국체전 관련 토막 뉴스가 신문에 실렸다. 1966년 10월 11일 제47회 전국체육대회 이틀째 경기가 벌어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이 경기장을 그때는 서울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이라고 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곳에는 전국체전 때 쓰는 성화대가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요즘의 눈으로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성화대였지만 전국체전이 열리는 기간 내내 성동원두(城東原頭·서울 동쪽의 너른 들판, 즉 서울운동장)를 밝히곤 했다. 이때만 해도 지방 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이어서 전국체전은 주로 서울에서 열렸다. 1960년대에도 제47회 대회를 비롯해 다섯 차례 대회를 서울특별시가 주최했다. 

육상경기는 그때나 이제나 별로 인기가 없어서 메인 스타디움은 한산하기만 했다. 게다가 가을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7살의 김정호 학생은 경기를 보기도 따분하고 입도 텁텁해 오징어를 샀는데 구워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활활 타고 있는 성화였다. 서울운동장 성화대는 성인이 까치발을 하면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김정호 학생 왈 "집에서 구워 먹는 것과 맛이 같았다"나. 이제는 이 해프닝을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스포츠 팬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요즘과는 무척 다른 목가적인 분위기의 전국체전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일화와 함께 전국체육대회는 ‘스포츠 소년’에게는 꼭 서 보고 싶은 꿈의 무대였다. 

1991년 10월 전주 일원에서 펼쳐진 제72회 전국체육대회가 글쓴이의 전국체전 데뷔 무대였다. 프로 야구 기자로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때는 잠시 프로 야구를 맡고 있지 않았다. 대회 분위기는 1980년대 초반 전국 소년체전과는 10여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986년과 1988년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치른 나라가 여는 대회다운 분위기였다. 

참가 선수가 2만2,068명으로 당시 기준 역대 최다였고 경기 종목 또한 660개 세부 종목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 대회의 의미는 외형적인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라북도는 전국체전을 2차례(1963년 제44회 대회, 1980년 제61회 대회) 치른 경험을 활용해 대회를 잘 치렀다. 2003년 제84회 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는 전라북도가 개최하는 4번째 전국체전이다. 

대회 규모가 커지고 외양은 화려해졌지만 대회에 모인 기자들 움직임은 크게 바뀐 게 없었다. 취재 내용을 서울 본사로 송고하고 경기 일정이 끝나면 취재반원끼리 몰려가 한잔하고. 그런데 역시 전주는 음식의 고장이었다. 콩나물국밥과 곁들여 나오는 모주를 먹기 위해 전날 저녁에 술을 마신다는 친구가 있을 정도였다. 민물고기 매운탕인 ‘오모가리탕’은 별미 가운데 별미였다. 

요즘은 스포츠 담당인데도 전국체전을 취재한 경험이 없는 기자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1982년 야구를 시작으로 축구와 농구, 배구 등 인기 종목이 속속 프로화 하면서 스포츠 기사의 무게중심이 프로 쪽으로 쏠린 데다 야구와 축구, 골프 등 우수 선수들의 국외 진출과 이들의 활약상이 국내 스포츠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스포츠 기자들의 취재 영역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국체육대회는 스포츠 기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취재 코스다. 그 말은 전국체전은 오늘날 한국 스포츠의 모두라는 뜻이다. 전국체육대회가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국체육대회는 새로운 시대에도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이자 국민적 축제의 마당으로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2만 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례 행사는 전국체육대회가 거의 유일하다. 대통령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꼬박꼬박 개회식에 참석한다. 출범 100년을 눈앞에 둔 국가적 행사인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국체전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대회 성격은 이미 스포츠와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다. 

개최 종목과 선수 숫자 등 대회 규모는 세계적인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올림픽은 비대화를 막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시행하고 있고 아시아경기대회도 대회 규모를 줄이고 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전국체육대회도 마냥 대회 규모를 늘려 갈 수는 없다. 최근 생활체육 종목이 늘어나고 있는 건 어떻게든 조정이 필요하다. 대한체육회가 스포츠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생활체육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기는 하다.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전국체전은 영원무궁해야 한다는 게 글쓴이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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