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개 숙인 한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말레이시아 선수들. ⓒ연합뉴스
▲ 예상 외의 결과에 허탈한 한국 선수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반둥(인도네시아), 유현태 기자] 승패의 세계 뒤엔 평범한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펜으로 적는 일기장은 몇 번인가 열어 글을 적었지만, 어쨌든 기사로 나가는 '인니일기'엔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물갈이인지 장염인지 배앓이를 하고 몸살 기운이 겹치고, 연이은 경기와 훈련을 쫓아다니느라 힘들다고 토로하는 내용들 뿐이다. 이제 밥을 먹어도 화장실에 뛰어가야 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다시 '인니일기'를 재개할 적기다.

스포츠 기자, 그것도 축구 기자가 된 것은 순전히 축구가 좋아서다. 지금도 1주일에 1번은 축구를 직접 하러 가고, 주말은 축구를 보면서 보낸다. 주중에도 보고 싶은 경기가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챙겨본다. 좋아하는 걸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다니 장점이 확실한 직업이다. 밤낮이 뒤바뀌고 경기장까지 이동도 많지만 그래도 축구가 있기에 즐겁다.

기자가 되고 나서는 지도자들, 선수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질문하는 시간은 경기를 보면서 느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취재진과 선수가 자연스럽게 섞인다는 뜻의 믹스트존을 특히 좋아한다. 경기 뒤 선수들이 반드시 거치는 '믹스트존'은 경기장에서 '축구 선수'로 보던 선수들을 '사람'으로 만나는 곳이다.

경기에 대해 묻고, 특별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듣는다. 선수들마다 성격도 제각각이다. 말을 잘하는 선수, 못하는 선수, 말은 많은데 핵심은 없는 선수, 짧게 할 말만 하는 선수 등. 

믹스트존에선 굳이 인터뷰를 하지 않더라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패배하고 나가는 팀의 선수들의 얼굴에 서린 실망과 아픔도 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떠나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패잔병이다. 다음 경기에 다시 투입돼 힘을 내는 걸 보면 선수들은 신체 능력 뿐 아니라 정신력도 참 뛰어난 선수들이란 생각을 한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축구 역시 승패가 갈린다. 누군가는 웃고 또 누군가는 운다. 경기 전 '객관적 전력'이란 이름으로 일반적인 예상이 나오지만, 그래도 경기를 진행하는 것은 예상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해봐야 안다. 지난 17일 한국이 말레이시아에 1-2로 패할 것이라고 본 이는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한국도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겼다. 그래서 축구를 보는 것 아닌가.

말레이시아전 패배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팀 전체도, 김학범 감독도, 선수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한국 축구 전체를 향한 실망으로 들끓는 듯하다. 자존심도 다쳤을 것이 분명하다. 승리는 스포츠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다. 패배하면 비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응원하는 마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기분이 안 좋은 것들은 나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직항으로만 무려 7시간.(나는 경유하는 항공편을 타서 10시간쯤 걸렸다.) 자카르타에 내려서 반둥까지는 3시간은 족히 걸린다. 이 멀리까지 패배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다. 하필 첫 해외 출장에선 A 대표 팀이 중국 창사에서 중국에 0-1로 패했다. 동료 중 한 명은 내게 '패배 요정'이란 별명을 붙였다.

다만 믹스트존에서 본 선수들이 눈에 밟힌다. 말레이시아전을 마친 뒤 선수들의 표정은 정말 어두웠다. 황희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좀처럼 들지 못했다. 한 달 전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고 농담까지 하며 인터뷰하던 이승모도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굳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선수가 맞나 싶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패배에서 상처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비판을 그만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대신 선수들도 경기장 밖에선 하나의 평범한 사람, 하나의 인격체다. 그들도 상처를 받고 또 칭찬에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말레이시아전을 마친 뒤 굳은 얼굴로, 평소에 비해 처진 어깨로 버스에 오르던 선수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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