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황영조는 2시간11분13초의 기록으로 원폭 투하 장소인 평화공원에 골인해 2년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로 ‘몬주익의 영웅’ 칭호를 얻었던 감격을 재현하며 온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대한체육회
한국에서 30년 만에 열린 올림픽인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4년마다 돌아오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 해인 올해 또 하나의 국제 종합 경가 대회는 제18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다. 이번 대회는 1962년 제4회 대회(자카르타) 이후 56년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린다. 8월 18일부터 9월 2일까지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에서는 40개 종목에서 462개의 금메달을 놓고 우정의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은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한국전쟁 와중에 불참했지만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꾸준히 출전하며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한국의 아시안게임 출전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이 한겨울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였다면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994년 10월에는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2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동·하계 올림픽을 교차 개최하기로 한 뒤 이해부터 같은 해에 동계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여름철 아시아경기대회가 4년마다 열리게 됐다. 

히로시마 대회는 인도의 인권 운동가이자 IOC 위원인 구르 드트 손디의 주도적인 활약으로 1951년 뉴델리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의 수도가 아닌 도시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역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을 압도하다가 1986년 서울 대회를 계기로 한국에 밀리기 시작한 일본은 자국에서 열리는 이 대회만큼은 한국에 뒤질 수 없다는 의지로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내보내며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메달 밭으로 기대했던 육상과 수영에서 금메달을 대거 중국에 잠식당해 폐회식을 마칠 때까지 금메달 59개와 은메달 75개, 동메달 79개로 중국(금 125 은 83 동 58)은 물론 한국(금 63 은 56 동 64)에도 뒤진 채 3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수영에서 금메달을 땄던 중국 여자 선수 가운데 5명이 폐막 직후 실시된 도핑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판명돼 메달을 박탈당하면서 해당 종목의 2위 선수가 금메달을 승계하게 됐다. 금메달을 승계한 2위 선수 5명이 모두 일본 선수로 일본의 금메달이 5개 늘어났다. 한국의 금메달 숫자가 공교롭게도 63개여서 폐막 시점에서 금메달 59개에 5개를 추가해 64개가 된 일본에 추월당했다. 

한국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과 관련한 문제도 아니고 금지 약물 복용 선수에 대한 제재에 따라 생긴 일이니 대회조직위원회에 항의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한국은 1986년 서울 대회 이후 8년 만에 종합 순위 2위를 일본에 내줬다. 

히로시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과 축구 한일전이었다. 황영조는 2시간11분13초의 기록으로 원폭 투하 장소인 평화공원에 골인해 2년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로 ‘몬주익의 영웅’ 칭호를 얻었던 감격을 재현하며 온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다 고이치가 황영조를 따라잡지 못하고 은메달에 머물렀던 사실을 기억하는 일본은 지구력이 좋은 하야다 도시유키에게 설욕을 기대했지만 그 역시 황영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4개월 전인 4월 19일 열린 제98회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8분9초를 마크해 당시 한국 최고 기록(김완기, 2시간8분34초)을 25초 앞당기는 한국 최고 기록을 수립한 바 있는 황영조는 풀코스 완주 6차례 만에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를 제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에서는 연장전을 떠올리는 순간 황선홍이 페널티 마크 부근에서 일본 수비수 반칙을 유도해 얻은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골로 연결해 대접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한체육회

축구 8강전인 한일전 승리도 국민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경기 종료 직전 추가 시간에 얻은 페널티킥으로 결승점을 뽑아 3-2로 극적인 승리를 거둬 더욱 인상적이었다. 전반에 하시라타니에게 선제골을 내준 한국은 후반 8분 유상철이 동점 골을 터뜨린 뒤 33분 황선홍이 역전 골을 뽑아 승리를 눈앞에 뒀으나 경기 종료 4분을 남겨 놓고 기타자와에게 30m 중거리 슛을 허용해 2-2 동점이 됐다. 연장전을 떠올리는 순간 황선홍이 페널티 마크 부근에서 일본 수비수의 반칙을 유도해 얻은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골로 연결해 대접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벌어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이후 이어져 온 40년 한일 축구 맞대결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평가할 만한 흥미 만점의 명승부였다. 8강전을 통과한 축구는 준결승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패한 데 이어 3위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에 1-2로 져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한일전의 승리가 갖는 상징성만으로도 메달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었다.

한국은 수영 남자 배영 200m에 출전한 지상준이 2분00초05의 아시아 신기록으로 1990년 베이징 대회에 이어 2연속 우승한 것을 비롯해 32개 출전 종목 가운데 22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고른 성적을 올렸다.

히로시마 대회는 ‘비운의 사나이’ 송성일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다. 송성일이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개막 나흘째인 10월 5일이었다. 시상식을 마치고 선수촌으로 돌아온 그는 금메달의 기쁨으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잠을 청해 보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금메달의 기쁨 때문만은 아닌 듯 몸에 이상을 느낀 송성일은 날이 밝자마자 의무실로 달려갔다. 대회조직위원회 산하 의무분과위원회를 대표하는 시키모리 다카야스 도카이대학교 교수는 과민성 대장 증세로 진단했다. 10월 8일 귀국했을 때도 증세는 마찬가지로 삼성의료원으로 달려가 정밀 검진을 받은 결과는 위암 말기였다.

이후 송성일은 석 달 남짓한 기간 종양 제거 수술과 신경 차단 허리 수술을 받으며 매트 위에서 보다 훨씬 힘든 투병 생활을 했지만 끝내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이듬해인 1995년 1월 29일 2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옛 소련에서 분리 독립해 이 대회부터 출전하기 하계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게 시작한 중앙아시아 나라들 가운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각각 4위(금 25 은 25 동 26)와 5위(금 10 은 11 동 18)에 오르며 아시아 스포츠계의 판도 변화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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