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울린 인천 '만세삼창' ⓒ한국프로축구연맹
▲ 문선민의 결승골 ⓒ한국프로축구연맹
[스포티비뉴스=인천, 유현태 기자] 경인선. 지금의 구로역과 인천역 사이를 연결한 1899년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다.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다는 의미와 함께 제국주의가 침투하는 계기가 됐다는 슬픈 단면도 있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해 두 지역은 당연히 거리가 가까워졌다. 서울과 인천의 왕래가 편리해진 것이 100년도 지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깝다고 친한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곳끼린 '앙숙'이 된 경우가 적잖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그러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그렇고, 또 그리스와 터키도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그 치열한 관계 속에 인천 유나이티드와 FC서울이 치르는 경기를 부르는 이름이 두 개가 된 것이 아닐까. 인경전(仁京戰) 또는 경인(京仁)더비. 인천 팬들은 인천의 '인'자가 앞에 오는 인경전을, 서울 팬들은 익숙한 '경인'이란 말을 넣는 경인더비라는 말을 주로 쓴다.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붙는 정기전이 그런 것처럼 이름에서도 기싸움을 한다.

역사는 승자의 쪽에서 기록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맞대결은 '인경전'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인천은 22일 '숭의아레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2018시즌 KEB하나은행 K리그1(클래식) 19라운드에서 서울을 2-1로 꺾고 16경기 무승 행진을 끊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인천 팬은 '인경전'을, 서울 팬은 '경인더비'를 즐기면 되는데. 모두 같은 방식으로 경기를 즐길 필요는 없다. K리그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즐기면 된다. 그래서 K리그 19라운드 인천과 서울 경기는 뜨거웠고 또 재밌었다.

▲ 원정 응원을 떠나온 서울 팬들.

올해 가장 더운 날씨였다. 기자가 '숭의아레나' 바로 앞에 있는 도원역에 내린 것은 경기 1시간 전인 5시가 조금 안된 시점. 도원역엔 인천의 '파란+검정' 조합 유니폼보다 '빨강+검정' 조합 유니폼들이 많았다. 거리가 가까우니 서울 팬들이 원정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은 것이다. 폭염 속에 원정을 떠난 서울 팬들은 간절히 승리가 보고 싶었을 터. 경기 시작 전부터 활기가 넘쳤다.

인천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도원역 근처에 적었던 이유는 경기장에 들어가서야 밝혀졌다. 평소보다 이른 5시에 이미 골대 뒤를 채우고 응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경기 시간이 임박하자 점차 '일반석'에도 팬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승리하겠다는 의지는 팬들 사이에서도 흘렀다. 인천은 2라운드에서 전북 현대전에 이어 무려 16경기 무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팬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걸개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 인천 팬들이 승리를 기원하며 킥오프 때 내건 걸개.

이기고 싶은 마음은 같지만 이유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17경기 만에 승리를 거둔 인천 팬은 얼마나 승리에 목이 말랐을까. 상대 전적에서는 분명 앞서는데 왠지 중요한 경기마다 발목을 잡혔던 서울 팬들도 인천의 '완전 침몰'을 보고 싶었을 터. 

팬들은 각자의 이유로 뜨거웠다. 90분짜리 축구 경기만이 아니라 그 이상 경기장 전체를 즐기러 왔다. 당연히 조용할 리 없다. 때론 상대를 자극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또한 도발이라고 말하겠지만, 애초에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 경기에서 그런 맛도 없다면 즐길 이유가 없다. 경기장 내부에서 '모두의 목소리'로 싸운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경기 시작 전부터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서포터가 많이 찾아온 덕분에 경기장은 이미 킥오프 전부터 '전시 상황'이었다. 홈팀 인천 선수가 등장하면 인천 응원석에선 환호가, 서울 응원석에선 야유가 쏟아진다. 서울 선수들이 등장하면 그 반대가 됐다

선수들의 마음도 반응했다. 평소 서울과 라이벌 의식이 크지 않았다는 김진야는 "다른 날처럼 평범하게 워밍업하러 나왔다가 양팀 서포터가 응원하는 걸 봤다. '더 집중해야겠다, 우리 팬들한테 기쁨을 안겨야겠다, 이 싸움을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밖에 없었다"면서 전의가 불타올랐다고 밝혔다. 승리가 간절한 상황에서 팬들의 목소리는 기폭제가 됐다..

▲ 이상호 선제골, 서울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프로축구연맹

경기 양상도 '더비'의 명성에 걸맞았다. 전반 6분 만에 윤석영의 크로스를 이상호가 머리로 받아넣으면서 원정 팀 서울이 한 발 앞섰다. 서울 팬들의 도발도 이어졌다. 그들은 "인천 강등! 인천 강등!"을 외치며 기죽이기에 나섰다. 아직 시즌이 한참 남았고 인천의 강등 여부가 서울 팬에게 큰 의미야 없겠지만, 인천을 흔들 수만 있다면 그 역시 서울의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기죽을 인천이 아니었다. K리그1이 창설된 뒤 서울과 경기에서 5승 4무 9패로 뒤진다지만 라이벌전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불성설. 반격은 이내 이어졌고 전반 13분 박종진의 도움을 받아 남준재가 골을 터뜨렸다. 폭염만큼 뜨거웠던 경기는 후반전이 되도록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 두 팀 모두 공격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더 간절한 수비를 넘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교체로 출전한 '월드컵 스타' 문선민이 바꿨다. 문선민은 후반 14분 무고사 대신 교체로 투입된 뒤 활발히 움직였다. 최전방에서 공이 오길 기다렸다가 역습을 노렸다. 후반 33분 후방에서 넘어온 패스를 흘리고 돌진하면서 이웅희를 제쳤다. 다급한 이웅희는 문선민을 잡아 2번째 경고를 받았고 인천이 나머지 시간을 수적 우세에서 치를 수 있었다. 인천 팬들은 이웅희의 퇴장에 다소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강등'을 외치던 서울 팬들에게 반격했다. "숭의에서 꺼져!"

그리고 후반 42분 고슬기의 패스를 받아 문선민이 깔끔한 역전 골을 성공했다. 이 순간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의 세 개 지역 모두 환호로 가득찼다. 바로 이 감격적인 승리를 현장에서 보기 위해 폭염도 뚫고 경기장을 찾은 것이 아닌가. 인천 팬들은 경기를 마친 뒤 "이겼다, 이겼다!"를 외치며 감동하고 또한 선수들과 만세삼창까지 했다. 4달하고도 열흘이 더 걸렸다.

▲ 해가 떨어지고 기온은 물론 팬들의 열기도 사라졌지만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숭의 아레나'

팬들이 마음껏 즐기는 경기는 선수들도 즐겁다. 김진야는 "(팬들의 기대에) 맞게 수준 높은 경기 보여드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저는 제 개인 응원을 해주실 때 정말 힘이 난다. 공격할 때 좋은 슛을 했을 때, 수비할 때 좋은 태클을 하면 팬들이 환호해주신다. 그때 힘든 걸 잠깐 잊게 된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30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도 환호를 듣는 그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는다는 뜻이다. 팬들이 있어야 선수들도 춤을 춘다.

K리그가 즐거운 것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고, 원하는 대로 경기를 즐길 수도 있다. 이날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찾은 유료 관중 수는 6062명. 인천 팬들은 오랜만에 거둔 승리를 즐기고, 서울 팬은 안타까운 패배에 쓰린 속을 달래며 다음 경기를 기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멋진 경기였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 언제나 승리할 순 없고 또 패배가 있기에 승리가 더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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