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범 23세 이하 축구 대표 팀 감독이 16일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 대표 팀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한희재 기자
▲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종목에서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왼쪽이 한국 주장 김정남. ⓒ한국축구10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8년 FIFA(국제축구연맹) 러시아 월드컵이 끝났다. 이제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다. 한국 축구는 이 대회를 잘 치르고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을 겨냥해야 한다. 이번 대회 목표는 우승이다. 그냥 우승이 아니고 2014년 인천 대회에 이은 2연속 그리고 통산 최다 우승(5회)이다. 이 목표를 이루면 앞으로 10년 정도 한국 축구를 이끌고 갈 선수들이 병역 특례 혜택을 받는다.

대한축구협회는 16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제18회 아시아경기대회에 나설 20명의 선수를 발표했다. 와일드카드로 러시아 월드컵에서 선전한 공격수 손흥민과 골키퍼 조현우가 포함됐다.

아시안게임 대표 팀은 오는 31일 소집돼 훈련에 들어간다. 다음 달 9일 이라크와 평가전을 치르고 10일 출국할 계획이다.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는 2개 나라가 조 추첨에서 누락돼 새로 조를 편성할 예정이다. 경기 일정과 출국 일정 등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1962년 제4회 대회 이후 56년 만에 아시아경기대회를 다시 여는 인도네시아는 이번 대회를 자카르타와 팔렘방, 서 자바 등지에서 분산 개최한다. 남자 축구는 소레앙 등 서 자바 4개 도시에서 경기한다.

한국은 제1회 대회(홍콩)와 제2회 대회(한국)에서 연속 우승하는 등 대회 초창기에 강세를 보인 아시안컵(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과 달리 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에서는 처음 우승하는 데 19년, 단독 우승하는 데 35년이 걸렸다.

한국은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에 한국전쟁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한국은 아시아경기연맹(AGF) 회원국이 아니었다. 한국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기간 현지에서 열린 AGF 임시총회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54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대회부터 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불참한 뉴델리 대회 축구 종목에는 6개 나라가 출전했다. 인도가 결승전에서 이란을 1-0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일본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2-0을 눌렀다. 준결승전에서는 인도가 아프가니스탄을 3-0으로 이겼고 이란은 일본과 0-0으로 비긴 뒤 재경기에서 3-2로 승리했다.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 축구 종목에는 12개 나라가 출전해 4개 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를 펼쳤다. A조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 월남(통일 전 남베트남) 필리핀, B조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파키스탄 싱가포르, C조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D조 한국 홍콩 아프가니스탄이었다.

한국이 홍콩과 3-3으로 비기고, 아프가니스탄을 8-2로 눌러 골 득실 차에서 홍콩에 앞서 조 1위로 4강에 오른 가운데 중화민국과 버마, 인도네시아가 준결승에 합류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3-5, 인도에 2-3으로 져 조 꼴찌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요즘의 아시아 축구 판도와는 꽤 다르다. 인도는 1958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종목 4강과 1964년 제3회 이스라엘 아시안컵 준우승 등 그 무렵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한국은 버마와 치른 준결승에서 연장 접전 끝에 2-2로 비긴 뒤 추첨승을 거둬 결승에 올랐다. 그때는 승부차기가 없었기 때문에 무승부가 되면 재경기 또는 추첨을 했다. 뒤에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리게 되는 최정민을 앞세운 한국은 결승전에서 중화민국에 2-5로 졌다. 당시 대만 선수들은 홍콩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버마가 인도네시아를 5-4로 물리쳤다.

1958년 제3회 도쿄 대회 축구 종목에서 한국은 조별 리그 D조에 편성됐다. 싱가포르를 2-1, 이란을 5-0으로 누르고 이란을 4-0, 싱가포르를 2-1로 꺾은 이스라엘과 함께 8강에 올랐다. 그런데 주최국 일본은 C조에서 필리핀에 0-1, 홍콩에 0-2로 져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요즘 일본 축구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결과다.

한국은 8강전에서 월남을, 준결승에서 인도를 각각 3-1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으나 중화민국에 연장 전접 끝에 2-3으로 져 1954년 제2회 대회(마닐라)에 이어 또다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만은 한국과 6승1무6패로 팽팽하게 맞섰다.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인도를 4-1로 이겼다.

1962년 자카르타 대회 축구 종목에는 대회 전체에 걸친 정치적인 문제로 이스라엘과 중화민국이 불참하면서 출전국이 8개국으로 줄었다. 두 나라는 그 무렵 아시아의 축구 강국이었다. 당시 제3세계 주도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이스라엘과 중화민국에 ID 카드 발급을 거부했다.

한국은 조별 리그 B조에서 인도를 2-0, 태국을 3-2로 물리친데 이어 일본을 1-0으로 꺾고 조 1위로 4강에 올랐다. 일본은 한국에 지고 인도에도 0-2로 져 1승2패로 3개 대회 연속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말레이시아를 2-1로 물리쳤으나 결승에서 인도에 1-2로 져 3개 대회 연속 은메달을 차지했다. 아시아 지역 축구 판도가 요즘과는 사뭇 다른 것을 비롯해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농구 배구 등 아시아경기대회 단체 구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1966년 방콕 대회 축구 종목에서 한국은 조별 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A조에서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져 조 꼴찌를 기록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본선 출전을 목표로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대표 팀을 꾸렸다고는 하나 조별 리그조차 통과하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그해는 6월에 열린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올라 국내 축구계에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선수가 태릉선수촌을 무단으로 이탈하고 코칭 스태프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와 축구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웠다.

이 대회 결승에서는 버마가 이란을 1-0으로 꺾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2-0으로 눌렀다.

이때 일본 대표 팀에는 이듬해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1조 예선에서 한국을 골 득실 차로 제치고 본선에 올라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주역으로 활약하는 가마모토 구니시게(멕시코시티 올림픽 득점왕)와 스기야마 류이치, 요코야마 겐조, 마츠모토 이쿠오, 미야모토 데루키 등 주전 선수 대부분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아시아경기대회 동메달 멤버가 올림픽 동메달을 딴 것이다.

1970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은 공동 우승이긴 했지만 축구 종목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 직전인 11월에 열린 제3회 킹스컵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1차 조별 리그 C조 첫 경기에서 난적 이란을 1-0으로 꺾은 뒤 인도네시아와 0-0으로 비겨 2차 조별 리그에 올랐다.

2차 조별 리그 첫 상대는 홈그라운드의 태국이었다. 전 대회 농구 경기에 못지않은 험악한 분위기에서 경기가 펼쳐져 박이천과 정강지, 김호 등이 관중석에서 날아 온 빈 병과 돌에 맞아 그라운드에 쓰러지기도 하는 가운데 2-1로 이겼다. 한국은 전 대회 농구 경기 준결승에서 홈 코트의 태국과 맞섰는데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자 일부 관중은 물론 경찰까지 가세한 난투극에 휘말리는 불상사 끝에 경기 중단 당시 스코어로 승패를 가려 52-67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은 두 번째 경기에서 버마에 0-1로 졌지만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라 라이벌 일본과 맞붙게 됐다. 전해인 1969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1승1무(2-0 2-2)로 앞선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박이천의 결승 골로 2-1로 이겼다.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인도를 2-0으로 꺾고 올라온 버마와 결승에서 다시 만나 0-0으로 비겨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에 성공했다. 한국의 아시안게임 축구 종목 첫 우승 멤버는 이세연 오인복(이상 GK) 김기효 최길수 서윤찬 김호 김정남 최재모(이상 FB) 박병주 임국찬 홍인웅 김기복(이상 HB) 이회택 박이천 박수일 정강지 김창일 정규풍 박수덕 최상철(이상 FW)이다.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인도가 일본에 1-0으로 승리했다.

1974년 테헤란 대회는 한국 축구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한국 축구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를 때 지역 예선 출전을 포기해 FIFA로부터 벌금 5,000 달러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앞서 나온 대로 그 무렵 한국 축구는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등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다.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 예선 출전을 포기한 이유는 북한의 전력을 의식한 점도 있지만 국가 대표 팀 경기력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성적이 좋지 않은 데다 국외 원정에 나선 일부 선수들의 불미스러운 행위가 잇따르자 문교부는 1967년 4월 태국에서 열릴 제9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대한축구협회의 파견 재심 요청을 받은 문교부는 출전을 허가하면서 *선수 전원은 필승의 신념으로 싸울 것과 어떠한 추문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쓸 것 *대회가 끝난 뒤 홍콩 또는 제3국에서 친선경기를 갖지 말 것 그리고 이상의 조건을 어길 때는 앞으로 어떤 국제 대회에도 출전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문교부가 이런 조치까지 했지만 한국은 이 대회에서도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 축구는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한국 축구는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버마(오늘날 미얀마)와 공동 우승하는 등 서서히 경기력을 끌어올렸지만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다시 한번 창피스런 일을 겪게 된다.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종목에는 15개 나라가 출전한 가운데 한국은 쿠웨이트, 태국과 1차 조별 리그 B조에 들었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태국을 1-0으로 이겼다. 태국이 쿠웨이트에 2-3으로 져 한국과 쿠웨이트는 2차 조별 리그 진출을 확정한 가운데 조 1, 2위를 가리는 경기를 갖게 됐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B조에 속한 북한이 첫 경기에서 중국을 2-0으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이라크에 0-1로 지는 바람에 조 2위가 될 것이 확실해졌다. 한국이 쿠웨이트를 이기면 조 1위가 돼 2차 조별 리그에서 북한과 같은 조가 될 것이 틀림없게 됐다.

쿠웨이트와 경기가 있던 날 한국 선수단에는 북한과 경기를 피하기 위해 쿠웨이트에 지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쿠웨이트에 0-4로 크게 졌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은 쿠웨이트와 1972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 차례 만나 1-2로 진 적이 있었지만 그 뒤 2000년대까지 역대 전적에서 8승 3무 8패를 기록할 정도로 팽팽하게 맞섰다. 0-4로 대패할 전력 차가 아니었다. 한국 축구는 그 무렵 1971년 2월 남미 원정에서 페루에 0-4로 진 적이 있지만 아시아권 나라에는 단 한번도 4골 차로 진 일이 없었다.

2차 조별 리그에서 북한과 마주치지 않은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라크와 1-1로 비기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이란에 0-2로 지면서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말레이시아를 이기면 3위 결정전에서 북한과 만나게 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 2-3으로 져 한국과 북한의 경기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2차 조별 리그 B조에서 2위를 한 북한은 3위 결정전에서 A조 2위 말레이시아에 2-3으로 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결승에서는 이란이 이스라엘을 1-0으로 물리치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란은 이후 1990년 베이징 대회와 1998년 방콕 대회, 2002년 부산 대회에서 정상에 올라 한국(1970년 방콕 대회 1978년 방콕 대회 1986년 서울 대회 2014년 인천 대회)과 최다 우승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한국은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직후인 9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제3회 한일 축구 정기전에서 1-4로 대패했다. 1974년은 한국 축구가 잊고 싶은 해가 됐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